지친 하루 끝에 이어폰을 꽂고 이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습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내내 가슴 어딘가가 아릿하게 조여드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OST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닙니다. 잘해보려 애써도 늘 제자리인 것 같은 날, 이 음악은 꽤 효과적인 처방이 됩니다.

고독 — 잘하려 할수록 더 막막해지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
저는 요즘 들어 잘해보려고 할수록 더 뒤처지는 것 같은 감각에 자주 시달렸습니다. 노력이 쌓이지 않고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느낌. 이 플레이리스트의 초반부 트랙들은 정확히 그 감각을 건드립니다.
드라마에서 동만이 겪는 감정은 이른바 '내면화된 열등감'에 가깝습니다. 내면화된 열등감이란 외부의 실패나 비교에서 비롯된 감정이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믿음으로 굳어지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나는 원래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상태입니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 따르면, 이처럼 자기 가치감이 낮아진 상태가 지속되면 회피 행동과 감정 마비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출처: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초반 트랙들은 "혼자라는 쓸쓸함"과 "익숙한 침묵"을 정면으로 묘사합니다. 제가 직접 들어봤는데, 이 구간에서 악기 편성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습니다. 피아노 단선율과 최소한의 현악 레이어만 남긴 이 구성은 음악 제작에서 말하는 스파스 어레인지먼트(Sparse Arrangement)에 해당합니다. 스파스 어레인지먼트란 음표와 음색을 의도적으로 덜어내어 여백이 감정을 대신 채우도록 만드는 편곡 방식입니다. 그 여백 안에서 듣는 사람이 자기감정을 투영하게 되고, 그래서 더 깊이 찔립니다.
이 구간을 들을 때 저는 이어폰을 빼지 못했습니다. 내 속마음이 들킨 것 같은 민망함과, 동시에 "아, 이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이 동시에 왔기 때문입니다.
치유 서사 — 음악이 드라마의 구원 서사를 어떻게 소리로 번역하는가
플레이리스트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음악의 결이 달라집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드라마 중반까지 동만이 보여준 날 선 냉소와 블랙코미디적 감각을 감안하면, 음악이 이렇게 빠르게 따뜻한 방향으로 선회할 줄 몰랐습니다.
박해영 작가 특유의 구원 서사는 이 지점에서 음악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구원 서사(Redemption Narrative)란 상처받은 인물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자기 존재의 가치를 회복해가는 서사 문법을 의미합니다. <나의 아저씨>, <마이 디어 미스터> 등 박해영 작가의 전작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이 문법이 이번 OST의 음악적 흐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상처를 안아주고 갈 곳이 되어주는 관계를 그린 트랙들이 중반 이후 잇달아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제 경험상 이 지점이 플레이리스트의 가장 강한 구간입니다. "도망치지 않고 묵묵히 잡아주겠다"는 헌신의 정서가 담긴 트랙들은, 음악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적 동기화(Emotional Entrainment) 효과를 명확히 유발합니다. 정서적 동기화란 음악의 감정적 흐름이 청취자의 심리 상태에 동조되면서 내면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거나 완화되는 현상입니다. 실제로 음악치료 분야에서는 이 원리를 적극 활용하는데, 한국음악치료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정서적으로 공명하는 음악을 반복 청취했을 때 불안 지수가 유의미하게 낮아졌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음악치료학회).
이 플레이리스트에서 치유 서사가 특히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초반의 절제된 편성이 감정을 쌓아두는 역할을 하고, 중반 이후 현악과 보컬이 풍성해지면서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 "잡아주겠다"는 헌신과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는" 상호작용이 음악의 가사 서사에서도 동일한 순서로 배치된다.
- 각 트랙이 드라마의 특정 장면과 연결되어 있어, 시청 후 감상 시 감정의 잔향이 훨씬 강하게 작동한다.
위로 — 그런데 이 플레이리스트가 모두에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이 앨범이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이 점점 웅장해집니다. 오케스트레이션이란 현악, 관악, 타악 등 다양한 오케스트라 악기를 조합해 풍성한 사운드를 만드는 작업 방식을 말합니다. 이 웅장한 사운드와 정형화된 러브송 위주의 구성이 후반부를 장악하면서, 드라마 중반까지 살아있던 날 선 긴장감이 상당 부분 희석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동만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포장하기엔 너무 많은 생채기를 품고 있었고, 그 생채기를 온전히 담아내려면 좀 더 미니멀한 인디 록이나 서늘한 포크 장르의 트랙이 중간중간 배치되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플레이리스트가 지닌 치유의 효능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 잘해보려 애써도 같은 자리만 맴도는 막막한 날들 속에서 이 음악을 들으며 스스로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게 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음악이 흐를수록, 언젠가 이 아픔이 지나간 자리에 익숙해질 수 있으리라는 단단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만약 지금 막막한 현실 앞에 멈춰 서 있다면, 이 플레이리스트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건너뛰지 말고, 타임라인 순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흐름 자체가 구원 서사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를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작동합니다. 이 음악은 동만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