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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스물하나 리뷰 (IMF 청춘, 페이스메이커, 캐릭터 빌딩)

by 시네로그_Cinelog 2026. 6. 29.

힘든 시절을 버티게 해 준 건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그냥 곁에 있어준 누군가였다고 기억하는 분, 저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1998년 IMF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꿈을 잃어가는 십팔 세 소녀 나희도와 집안 부도로 청춘을 저당 잡힌 청년 백이진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로맨스인가, 생존기인가"였습니다.

IMF가 빼앗은 꿈, 그리고 캐릭터 빌딩의 명과 암

1997년 말 한국을 강타한 IMF 외환위기는 단순한 경제 지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란 회원국이 외환 부족 등 국제수지 위기에 처했을 때 긴급 자금을 지원하는 유엔 산하 금융기구입니다. 쉽게 말해 국가가 빚을 못 갚을 위기에 처했을 때 긴급 구제를 받는 기구인데, 당시 한국은 그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수많은 기업이 무더기 부도를 맞았습니다. 드라마는 이 시대적 배경을 개인의 이야기로 정교하게 끌어내립니다. 희도가 다니던 학교의 펜싱부가 해체되는 것도, 이진의 집안 회사가 부도나는 것도, 그 거대한 역사의 파도가 작은 개인들을 어떻게 삼켰는지를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이 부분을 보면서 예상 밖으로 아팠던 건, 꿈이 외부 사정으로 강제 종료되는 그 허망함이었습니다. 희도는 펜싱을 계속하고 싶어 태양고로의 전학을 계획하는데, 그 과정에서 선택한 수단이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열정적인 스포츠 소녀라고 하면 정정당당한 실력 증명으로 길을 여는 서사를 기대하게 되는데, 이 드라마에서 희도가 선택한 방법은 강제 전학을 노린 학교 폭력 모의, 심지어 미성년자 신분의 나이트클럽 출입까지 포함됩니다.

캐릭터 빌딩이란 극 중 인물의 성격, 가치관, 행동 방식을 점진적으로 쌓아 올리는 서사 기법으로, 시청자가 인물에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핵심 장치입니다. 제 경험상 캐릭터 빌딩이 단단할수록 인물의 선택이 다소 엉뚱하더라도 납득이 되는데, 이 경우는 간절함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지나치게 희화화(caricature)된 방향으로 흘렀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희화화란 인물의 특정 특성을 과장해서 우스꽝스럽거나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꿈을 향한 맹목적인 돌진을 코미디로 소비하기보다, 스포츠맨십에 걸맞은 주체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면 서사의 완성도가 훨씬 높아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드라마 속 희도의 전학 도전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펜싱부 해체 통보 후 태양고 전학 결심
  • 엄마 설득 시도 → 거절
  • 강제 전학을 위한 학교 폭력 모의 → 실패
  • 나이트클럽 출입 시도 → 백이진과 재회
  • 코치에게 간청 → 테스트 합격 → 전학 성공

결국 마지막 단계인 코치의 테스트 합격이야말로 가장 희도다운 방식이었습니다. 앞선 일탈들이 없었더라도 이 장면의 감동은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페이스메이커가 된다는 것, 희도와 이진의 연대

저는 평소에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관계보다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관계를 훨씬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렇다 보니 희도와 이진의 관계가 다른 어떤 장면보다 깊이 와닿았습니다.

페이스메이커(pacemaker)란 원래 육상 등 중장거리 경기에서 다른 선수가 최적의 기록을 낼 수 있도록 일정 구간 앞에서 적정 속도를 유지하며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선수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의 최고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옆에서 리듬을 잡아주는 존재입니다. 희도와 이진은 서로에게 정확히 그 역할을 합니다. 이진이 IMF로 집안이 무너지고 꿈을 포기한 채 생계를 짊어지고 있을 때, 희도는 그를 거창하게 위로하는 대신 수돗가 분수대 앞에서 화려한 휴가를 만들어줍니다. 반대로 이진은 희도가 세상의 가혹함에 지쳐 주저앉을 때 "시대가 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라고 말하며 오히려 그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빈말로 괜찮다 하지 않고 현실을 함께 인정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태도, 이게 진짜 위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드라마 속 희도가 이진에게 "우리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행복하자"라고 건네는 장면은 한 편의 아름다운 어쿠스틱 음악처럼 마음에 남았습니다. 음악 치료(music therapy) 분야에서는 정서적 공명(emotional resonance)이라는 개념을 씁니다. 정서적 공명이란 타인의 감정 상태가 나의 내면과 진동 주파수가 맞아 깊이 울리는 현상을 뜻하는데, 이 장면이 저에게 정확히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맨스 드라마의 감동 포인트는 극적인 고백이나 키스 신에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오래 남는 장면은 오히려 이런 작고 사소한 대화입니다. 두 사람이 나눈 비밀스러운 약속, 서로에게만 존재하는 작은 세계, 이것이 이 드라마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라고 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드라마 시청자들이 감정 이입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요소는 화려한 스펙터클보다 캐릭터 간의 진정성 있는 관계 서술이라고 합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희도와 이진의 관계는 그 데이터가 말하는 바를 고스란히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또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1998년 기준 7%를 넘어섰으며, 약 158만 명이 직장을 잃었습니다(출처: 통계청). 드라마가 그리는 이진의 집안 부도와 꿈의 강제 종료는 당시 수백만 가정이 실제로 겪었던 현실입니다. 그 구체적인 숫자를 알고 나면 이진의 눈빛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역사의 무게처럼 느껴집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완벽한 드라마가 아닙니다. 캐릭터 빌딩 과정의 일부 설정은 분명히 아쉽고, 희도의 일탈이 로맨틱 코미디의 소재로만 소비되는 부분은 좀 더 날카롭게 다듬어질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IMF라는 시대가 개인의 꿈을 어떻게 짓밟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도 서로의 페이스를 맞춰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를 이토록 감각적으로 담아낸 드라마는 흔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면, 이 드라마를 한 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수돗가 분수대 장면에서 제가 그랬듯, 잠시 숨이 트일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WNFxK9s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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