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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일까? (첫사랑, 선택, 조율)

by 시네로그_Cinelog 2026. 6. 20.

솔직히 저는 첫사랑 소재 드라마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열에 아홉은 비슷한 오해와 눈물로 채워진, 예측 가능한 공식의 반복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우연일까?>를 보다가 제 경험과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맞닿는 순간이 있었고, 그때부터 이 드라마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첫사랑이라는 낡은 소재를 새롭게 다루는 방식

일반적으로 첫사랑 소재 드라마는 과거의 달콤한 기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 <우연일까?>는 그 공식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극 중 이홍주는 "첫사랑은 냉동식품처럼 꽁꽁 얼려두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냉동식품 비유는 단순한 위트가 아니라, 사랑에 상처받은 현대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차단하는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를 상징합니다. 방어 기제란 심리학적으로 불안이나 고통을 유발하는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차단하거나 회피하는 심리적 전략을 의미합니다. 이 대사 하나로 홍주라는 인물의 내면이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되었는지가 드러납니다.

반면 강후영은 "이미 녹기 시작했다"는 태도로 홍주에게 다가갑니다. 두 인물의 이 충돌 구조가 드라마 전반의 감정적 긴장감을 만드는 핵심 서사 엔진입니다. 서사 엔진이란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붙이는 중심 갈등과 동력을 지칭하는 스토리텔링 용어로, 이 드라마에서는 그 역할을 '얼리려는 자'와 '녹이려는 자'의 대립이 담당합니다.

선택이라는 키워드, 드라마 밖에서도 유효했습니다

극 중 강후영이 어머니에게 사표를 제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저는 그 장면에서 묘하게 과거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저는 과거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행사를 기획하고 무대 뒤편의 수많은 요소를 조율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현장에서 '정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산, 시간, 인력이라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선택이란 없었고, 하나의 돌발 변수가 전체 기획을 흔들 때마다 치열하게 소통하며 방향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후영이 어머니의 압박과 홍주와의 미래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가는 조율의 과정은, 그때 제가 현장에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중심을 잡으려 애쓰던 순간들과 정말 닮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시청자가 드라마에 몰입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인물의 선택이 자신의 경험과 겹치는 순간'이라고 합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제가 이 드라마에서 그 정확한 경험을 했다는 게, 작품의 완성도를 방증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선택'이 중요하게 기능하는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후영이 어머니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자신의 삶을 직접 결정하는 장면
  • 이홍주가 강후영 어머니의 설득에도 자신의 마음을 굽히지 않는 장면
  • 두 사람이 미국행을 두고 각자의 꿈과 사랑 사이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
  • 모든 우연이 사실은 서로를 향한 선택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마지막 장면

조율의 드라마, 그런데 후반부는 아쉬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웰메이드 로맨스 드라마는 갈등의 해결 과정에서 인물들의 성장이 유기적으로 드러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우연일까?>의 후반부는 그 기준에서 조금 멀어진 느낌이었습니다.

후영의 어머니가 홍주에게 "아들의 앞날을 위해 물러나 달라"고 압박하는 설정은 기존 드라마에서 수없이 반복된 클리셰(cliché)입니다. 클리셰란 원래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너무 자주 사용되어 신선함을 잃어버린 진부한 표현이나 설정을 의미합니다. 이 설정이 등장하는 순간, 저는 솔직히 "또 이 패턴인가" 하는 피로감을 느꼈습니다.

또한 각자의 커리어와 사랑 사이에서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갈등 플롯이, 감정적 선언 몇 마디와 낭만적인 바다 여행 시퀀스로 빠르게 봉합되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행사 기획을 할 때 저는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핵심 이슈가 해결되지 않으면 반드시 그게 나중에 더 큰 문제로 터졌던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이 드라마도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현실적인 고민의 깊이를 좀 더 끌고 갔더라면 훨씬 묵직한 여운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 즉 이야기가 시작에서 갈등을 거쳐 해소로 이어지는 전체 곡선의 측면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흔들리지 않고 제 방향을 유지했습니다. 자극적인 막장 요소 없이 인물의 감정선에 집중한 점만으로도 충분히 차별화된 작품이라고 봅니다.

우연과 운명, 결국 무엇이 두 사람을 이어붙였나

드라마의 마지막은 꽤 인상적인 결론을 냅니다. 모든 우연처럼 보였던 사건들이, 사실은 서로를 향한 '운명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다는 것입니다. 강후영은 10년 전에도 지금도 이홍주를 좋아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그 3년의 공백조차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드라마가 제시하는 핵심 개념은 귀인이론(attribution theory)과 맞닿아 있습니다. 귀인이론이란 사람들이 어떤 사건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는지를 설명하는 심리학 이론으로, 같은 사건도 '우연'으로 볼지 '선택'으로 볼지는 그 사람의 관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시종일관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선택'이라는 해석을 관객에게 설득합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며 가장 설득된 대사는 사실 선생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과 사랑은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말.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국민 여가 활동 실태 조사에 따르면, 드라마 시청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일상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로'라고 합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저도 그 위로를 정확히 받았습니다. 정답을 찾지 못해 불안하더라도, 서로를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조율해 나갈 때 비로소 우연을 완벽한 결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이게 이 드라마가 남긴 가장 진한 문장이었습니다.

<우연일까?>는 클리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선택'이라는 주체적인 키워드를 일관되게 밀어붙인 작품입니다. 첫사랑 드라마가 식상하다고 느끼셨던 분이라면, 이 작품은 그 편견을 반쯤은 바꿔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아니더라도, 정답 없는 선택의 순간 앞에 서 있는 분이라면 더욱 깊게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tjXVwlXr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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