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에 지쳐 별 기대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어느새 눈물을 훔치며 화면을 붙잡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조립식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쌓으며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혈연만이 가족인가?'라는 질문을 이 드라마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던집니다.

밥상 하나로 시작된 가족, 어떻게 묶였을까
칼국수집 사장 정재와 그의 딸 주원, 그리고 윗집 아랫집으로 이사 온 사나, 해준이 한데 얽히기 시작한 건 사실 우연에 가까운 이웃 관계였습니다. 제가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이 관계의 출발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엄마를 잃은 아이, 동생의 죽음 이후 엄마의 탓으로 시골로 도망쳐 온 아이, 그리고 엄마가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 하나만 붙들고 이모 집에 맡겨진 아이. 셋 다 결핍을 안고 있었고, 정재의 칼국수 한 그릇이 그 결핍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구조입니다.
드라마 이론에서는 이처럼 혈연이 아닌 선택과 공동생활로 형성된 가족 형태를 '대안가족(Alternative Family)'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대안가족이란 법적·생물학적 혈연관계없이도 정서적 유대와 상호 돌봄을 바탕으로 구성된 가족 단위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드라마 설정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점점 확산되고 있는 가족 형태입니다. 실제로 1인 가구와 비전통적 가구 형태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 속에서 대안가족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제가 이 초반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가정 환경을 조롱하는 외부인에게 단호하게 맞서는 부분이었습니다. "오빠 동생이 없다"는 식의 무례한 말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이 가족이 외부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속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혈연 없이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증거
<조립식 가족>이 다른 가족 드라마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가족의 '법적 완성'을 고민하는 서사를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아이들은 성씨 문제로 정체성 혼란을 겪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양자결연(Adoption)'입니다. 양자결연이란 혈연관계가 없는 성인과 미성년자 사이에 법적인 부모-자녀 관계를 맺는 절차를 뜻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통해 성립됩니다. 이 드라마는 양자결연을 단순한 법적 절차가 아니라, 10년의 정서적 유대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감정적 결단으로 그려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아이들이 성씨 하나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그 성씨를 통해 서로를 '제 가족'으로 공식화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참 짠했습니다.
드라마 속에는 정서적 유대 외에도 일상적 상호 돌봄, 즉 '케어 이코노미(Care Economy)'의 요소가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케어 이코노미란 가정 내 돌봄 활동이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는 개념으로, 정재가 아이들에게 차려주는 밥상과 생활 지원이 사실상 이 가족의 결속을 유지하는 핵심 자원임을 보여줍니다. 가족을 유지하는 것이 감정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의 행위들임을 이 드라마는 조용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조립식 가족>이 보여주는 가족 서사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혈연이 아닌 선택과 공동 생활로 시작된 대안가족 구조
- 법적 양자결연을 통한 가족 관계의 공식화 시도
- 일상의 돌봄(밥상, 보호)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결속
- 외부의 조롱과 편견에 맞서 서로를 지키는 연대 의식
후반부의 빌런, 과연 필요한 장치였을까
솔직히 이 부분은 제가 시청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대목입니다. 극 후반부로 갈수록 '친부모'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해준을 금전적으로 이용하려는 친부와 사나의 트라우마를 다시 자극하는 엄마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의 등장은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서사 장치로서의 역할, 즉 드라마 문법에서 말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긴 합니다. 안타고니스트란 주인공의 목표와 갈등을 일으키는 대립 인물을 지칭하는 서사 용어입니다.
문제는 이 안타고니스트들이 너무 일차원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사나의 엄마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딸의 과거 상처를 다시 건드리고, 해준의 친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금전 목적으로만 움직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도는 시청자로 하여금 감정적 피로감을 누적시킵니다.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온 따뜻한 서사가 외부의 이기적인 인물 한 명으로 인해 너무 쉽게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실제로 드라마 서사 연구에서는 갈등 유발을 위해 단순한 악인 캐릭터를 반복 투입하는 방식을 '작위적 갈등(Artificial Conflict)'이라 부르며, 이는 서사의 내적 논리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됩니다(출처: 한국방송학회). 쉽게 말해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갈등이 아니라, 외부에서 억지로 꽂아 넣은 갈등이라는 인상이 강해진다는 뜻입니다. <조립식 가족>의 후반부가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다시 켜는 이유
아쉬운 지점이 있어도 제가 마음이 허해질 때마다 이 드라마를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외부의 흔들림 속에서도 아이들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준이 친부와 삼자 대면하는 장면에서 정재 곁에 남겠다는 진심을 드러내는 순간, 주원과 사나가 혈연에 대한 오해로 갈등을 빚었다가 진심 어린 사과로 관계를 회복하는 장면, 이런 순간들이 이 드라마의 진짜 무게를 만들어냅니다.
드라마 심리학에서는 이런 서사 구조를 '레질리언스 내러티브(Resilience Narrative)'라고 부릅니다. 레질리언스 내러티브란 역경과 외부 충격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내적 자원과 관계를 통해 회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 구조를 뜻합니다. <조립식 가족>은 바로 이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고, 그래서 보고 나면 왠지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막장 요소의 아쉬움이 있지만, 그 틈새를 따뜻한 휴머니즘과 아이들의 주체적인 성장이 메워주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나 혼자 산다'는 말이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시대에, 선택으로 만든 가족이 혈연보다 단단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분명 한 번쯤 볼 가치가 있습니다.
결이 맞는 드라마를 찾고 계신다면, 넷플릭스에서 <조립식 가족>을 한 화만 먼저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아마 저처럼 두 화, 세 화를 연달아 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